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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채만식 – 풍자 속에 감춰진 시대의 아픔

by 바람의 독서가 2025. 11. 17.

채만식의 태평천하 표지 이미지 출처: 창비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채만식의 태평천하 - 이미지 출처: 창비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태평천하』 (채만식 저)는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윤직원이라는 노인을 중심으로, 친일 지주 가문의 타락한 모습을 통해 당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오래전 한국문학사 수업 시간에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는 제목만 보고 평화로운 이야기일 거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마주한 건 '태평천하'라는 반어적 표현 뒤에 숨겨진, 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윤직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본 시대의 민낯은 어떠했는지, 풍자와 아이러니로 그려낸 조선의 현실이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윤직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본 시대의 민낯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은 70대 노인이지만, 그의 내면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채만식은 이 인물을 통해 일제에 빌붙어 살아가는 친일 지주 계층의 추악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윤직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본 시대의 민낯은 상상 이상으로 처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안위만을 생각하며, 독립운동에 나선 손자를 경멸하고 친일 행위를 서슴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강렬하게 느꼈던 감정은 분노와 함께 찾아온 씁쓸함이었습니다. 윤직원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단순히 한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 전체의 병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는 평화가 민족의 고통 위에 세워진 것임을 외면하며, 오직 자기 가족의 안녕만을 바랍니다. 채만식은 이러한 인물을 통해 당시 일부 조선인들의 무감각함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윤직원이 손자의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화를 내는 대목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젊은이를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집안에 해가 될까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작가는 윤직원이라는 극단적 인물을 만들어내며, 독자로 하여금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이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가 당대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울이 되어줍니다.

풍자와 아이러니로 그려낸 조선의 현실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바로 풍자적 서술에 있습니다. 제목부터가 강력한 아이러니입니다. '태평천하'라는 말은 평화롭고 안락한 세상을 뜻하지만, 실제 작품 속 조선은 식민 지배 아래 신음하는 암울한 현실이었습니다. 풍자와 아이러니로 그려낸 조선의 현실은 독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윤직원만이 자신의 세계에서 '태평'을 누리고 있을 뿐, 대다수 조선인들은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윤직원의 일상을 묘사하며 끊임없이 비꼬는 듯한 어조를 유지합니다. 그가 밥을 먹고, 돈을 세고, 자손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든 순간이 조선의 비극과 대비되며 독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서술 방식 덕분에 저는 책을 읽는 내내 웃을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분노할 수도 없는 묘한 감정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채만식이 의도한 것이 바로 이런 복합적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히 친일파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인의 다양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독립운동에 나선 젊은이, 생존을 위해 타협하는 중산층, 그리고 윤직원처럼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는 인물까지. 이러한 인물 군상을 통해 독자는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대신, 복잡한 시대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작가의 냉철한 시선은 어느 한쪽도 미화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주는 데 집중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태평천하』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메시지는 현재에도 유효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합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입니다. 채만식이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결국, 시대가 요구하는 용기 앞에서 우리는 윤직원처럼 자기 이익만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옳은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작품을 읽으며 저는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부조리를 외면하고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태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구조, 그리고 불의에 침묵하는 방관자의 모습. 채만식이 그린 윤직원의 모습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현실의 단면입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으며, 매 순간 우리의 선택을 시험합니다.

또한 이 소설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과거를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채만식은 조선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진정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함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이 바로 『태평천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혀야 하는 이유입니다.

채만식의 냉소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은, 독자인 우리에게 "그래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 소설을 넘어, 인간의 양심과 선택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풍자 속에 감춰진 진심을 발견하는 순간, 비로소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