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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의 의식』 이타로 스베보 – 자기기만 속에서 발견한 인간의 진실

by 바람의 독서가 2025. 11. 30.

이타로 스베보의 제노의 의식 이미지 - 출처: 문학과지성사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이타로 스베보의 제노의 의식 - 이미지 출처: 문학과지성사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이탈리아 작가 이타로 스베보의 『제노의 의식』(원제: La coscienza di Zeno)은 1923년 처음 출간된 이후,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주인공 제노 코시니가 금연을 위해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제노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와의 관계, 결혼, 사업, 그리고 끊임없이 실패하는 금연 시도를 고백합니다. 이 글에서는 금연이라는 핑계, 끝없는 자기합리화의 기록, 아버지의 죽음과 왜곡된 기억, 사랑과 결혼,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을 중심으로 제노의 의식이 전하는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는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보고 '의식'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펼쳐 들었고, 첫 페이지부터 제노의 솔직하면서도 교묘한 변명들에 빠져들었습니다.

금연이라는 핑계, 끝없는 자기합리화의 기록

제노는 평생 담배를 끊으려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 담배"라고 다짐하며 벽에 날짜를 적어두지만, 그 다짐은 언제나 다음 담배를 피우기 위한 또 다른 핑계가 될 뿐입니다. 이타로 스베보는 제노의 이런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정교하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지 보여줍니다. 저는 금연이라는 핑계, 끝없는 자기합리화의 기록을 읽으며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늘 하루만큼은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합리화하던 저의 모습이 제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노의 금연 실패담은 단순히 중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재의 습관에 안주하려는 본능을 드러냅니다. 그는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담배를 끊지 않을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섬세한 심리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불편하지만 진실한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왜곡된 기억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제노가 아버지의 임종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제노는 아버지가 죽기 직전 자신의 뺨을 때렸다고 기억하지만, 그것이 정말 고의였는지 아니면 임종의 경련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타로 스베보는 아버지의 죽음과 왜곡된 기억을 통해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지, 그리고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재구성하며 살아가는지 보여줍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제 자신의 기억들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어떤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며 제 감정에 따라 조금씩 색이 바뀌어 있었고, 어쩌면 제가 기억하는 것은 실제 사실이 아니라 제가 믿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노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느낀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 죄책감마저 자신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심리는 인간 내면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 모두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깨닫게 합니다.

사랑과 결혼,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

제노는 아다를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결국 그녀의 동생 아우구스타와 결혼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노가 아우구스타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아다를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제노의 의식』은 사랑과 결혼,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을 통해 인간이 얻은 것보다 얻지 못한 것에 더 집착하는 심리를 탐구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가 살면서 내린 선택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현재의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선택하지 않은 다른 가능성들을 떠올리며 아쉬워합니다. 제노는 아우구스타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아다였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알 수 있습니다. 제노가 아다와 결혼했더라도 그는 여전히 다른 무언가를 갈망했을 것이라는 사실을요. 이타로 스베보는 제노의 이런 모습을 통해 인간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우리는 항상 부재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철학적 통찰을 전합니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합리화의 천재이며, 불완전한 기억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손에 쥔 행복보다 손에 쥐지 못한 가능성을 더 아름답게 여기는 존재입니다. 이타로 스베보는 제노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 내면의 어둡고 우스꽝스러운 면을 가감 없이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솔직함 속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기기만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 책은 저에게 자기 성찰의 거울이 되었고, 제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의식이란, 자신의 무의식적 거짓말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