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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염상섭 – 시대의 균열 속에서 발견한 가족의 초상

by 바람의 독서가 2025. 11. 6.

삼대 표지 이미지 - 출처: 을유문화사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삼대 - 이미지 출처: 을유문화사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장편소설 『삼대』는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조의관 집안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격변하는 시대를 담아낸 염상섭 작가의 작품입니다. 이 글에서는 구세대와 신세대가 교차하는 시선들, 여성 인물들이 견뎌낸 시대, 그리고 리얼리즘이 포착한 시대의 진실을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조부 조의관, 아버지 상훈, 손자 덕기로 이어지는 세 세대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각자의 생존 방식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단순한 가족사를 넘어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실존이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염상섭은 이 작품을 통해 전통과 근대, 보수와 개혁 사이에서 방황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내면을 치밀하게 포착해냅니다.

구세대와 신세대, 교차하는 시선들

『삼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깊은 골이었습니다. 조의관은 전통적 가부장으로서 재산을 지키려 하고, 상훈은 무능하고 방탕한 중간 세대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표류합니다. 반면 덕기는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지만 현실 앞에서는 무력한 청년입니다. 이 세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한국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습니다.

특히 조의관이 손자 덕기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경계심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가문의 지속을 위해서는 덕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염상섭은 이러한 모순을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더욱 씁쓸하고 진실되게 다가왔습니다.

덕기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고민이 곧 당대 지식인들의 고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지도, 그렇다고 일제에 협력하지도 못합니다. 단지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청년입니다. 이 무기력함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될 수 없으니까요.

여성 인물들이 견뎌낸 시대

이 작품에서 놓쳐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축은 여성 인물들입니다. 조의관의 첩 수원집, 덕기의 아내 홍경애, 그리고 덕기가 마음을 품었던 김병화까지. 염상섭은 이들을 통해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 인물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특히 홍경애의 처지는 가슴 아팠습니다. 신여성 교육을 받았지만 결혼 후에는 시댁의 며느리로, 아내로만 존재해야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당대 많은 여성들의 좌절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덕기와의 대화에서 보이는 지적 욕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의 꿈과 사회적 역할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

반면 김병화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신여성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시대의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염상섭은 이러한 여성 인물들을 통해 단순히 피해자의 서사가 아닌,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살아내는 주체적 존재로 형상화합니다.

리얼리즘이 포착한 시대의 진실

염상섭의 『삼대』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리얼리즘이 포착한 냉정한 시선에 있습니다. 작가는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명확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조의관의 탐욕도, 상훈의 무능도, 덕기의 우유부단함도 모두 그 시대가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이 객관적 시선이야말로 이 작품을 단순한 세대 갈등 소설을 넘어 시대의 기록으로 만드는 요소입니다.

소설 속 경성의 풍경 묘사는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합니다. 전차가 다니는 거리, 카페와 다방, 일본식 가옥과 한옥이 뒤섞인 풍경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1930년대 조선을 직접 걷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염상섭은 역사가 아닌 일상을 통해 시대를 증언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경제적 삶을 면밀히 다룹니다. 토지 문제, 재산 상속, 사업의 성패 등 구체적인 경제 현실이 인물들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이는 『삼대』가 단지 관념적인 문학작품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실제적 구조를 반영한 사회학적 텍스트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경제적 불안과 세대 갈등의 원형이 이미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거대한 사건들 뒤에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있고, 그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견뎌냅니다. 염상섭이 보여준 것은 영웅도 악인도 아닌,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의 초상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시대를 살아갈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아직도 답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삼대』는 그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