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 죽음 너머에서 들려오는 삶의 진실

by 바람의 독서가 2025. 11. 1.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관련 이미지 - 이미지 출처: 창비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 이미지 출처: 창비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마샤두 지 아시스의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원제: Memórias Póstumas de Brás Cubas)은 죽은 자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특별한 소설입니다. 브라질 문학의 거장 마샤두 지 아시스는 이 작품에서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브라스 꾸바스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 본성의 허위와 사회의 위선을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이 글에서는 죽은 자가 들려주는 삶의 아이러니, 인간 존재의 허무함과 그 안에서 발견하는 의미, 그리고 브라질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이야기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죽은 자가 들려주는 삶의 아이러니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저는 서문에서부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화자인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며, 산 자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에 더욱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다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진실을 말할 자유를 얻었다는 이 설정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샤두 지 아시스는 브라스 꾸바스라는 인물을 통해 19세기 브라질 상류층의 삶을 냉소적으로 그려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사랑했던 여인들, 추구했던 명예, 실패한 사업들을 담담하게 나열합니다. 그런데 이 담담함 속에는 깊은 아이러니가 숨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허황되었는지를 알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 비르질리아와의 관계를 회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솔직함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우리 내면의 어두운 면을 마주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허무함과 그 안에서 발견하는 의미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허무'였습니다.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꿈꾸었던 위대한 업적도, 불멸의 사랑도, 사회적 명성도 모두 허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마샤두 지 아시스는 이러한 허무함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을 질문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히 염세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브라스 꾸바스의 입을 빌려 삶의 무의미함을 말하면서도, 그 안에서 작은 의미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주인공이 회상하는 순간들 중에는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들도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영원하지 않았고, 불완전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실했습니다.

특히 제게 울림을 주었던 것은 브라스 꾸바스가 자신의 인생을 총괄하며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긍정도 부정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완전히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라는 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거창한 성취나 업적으로만 평가될 수 없으며,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의미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브라질 사회를 비추는 거울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은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19세기 브라질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마샤두 지 아시스는 노예제도가 존재하던 시대의 브라질을 배경으로, 상류층의 위선과 사회적 불평등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브라스 꾸바스라는 인물은 그 시대 특권층의 전형이며, 그의 삶은 곧 그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노예를 소유하고, 여성을 대상화하며, 가난한 자들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 이 모든 것을 회고하는 시점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깨닫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개인의 도덕적 타락은 곧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1881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마샤두 지 아시스는 당시로서는 매우 실험적인 서사 기법을 사용했으며, 사회 비판적 내용을 담아냈습니다. 브라질 문학사에서 이 작품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순을 폭로하고 독자들에게 성찰을 요구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저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 책은 죽음 이후의 시점에서 삶을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지금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브라스 꾸바스가 남긴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가면을 쓰고, 허영을 추구하며, 때로는 타인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의 삶을 회고하게 될 그 순간,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의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은 그러한 질문을 던지며,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