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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알프레트 되블린 – 파멸과 재생 사이, 한 인간의 실존을 마주하다

by 바람의 독서가 2025. 11. 16.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책 표지 이미지 - 출처: 민음사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 이미지 출처: 민음사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

알프레트 되블린이 저술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원제: Berlin Alexanderplatz)은 1920년대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추락과 구원을 그린 작품입니다. 출소한 전과자 프란츠 비버코프가 정직하게 살아보려 하지만 거대한 도시의 폭력과 유혹 속에서 끊임없이 좌절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도시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선 한 인간의 모습부터 파편화된 서사 속에 담긴 실존의 진실, 그리고 절망 너머의 재생, 인간다움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프란츠의 내면 여정을 따라가며, 되블린이 전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현대 도시 문명 속 개인의 고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도시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선 한 인간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프란츠를 압도한다는 점입니다. 도시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선 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알프레트 되블린은 도시의 소음, 전차의 궤도 소리, 광고판의 현란한 불빛까지 생생하게 묘사하며 독자를 1920년대 베를린 한복판으로 데려갑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프란츠는 "이제 정직하게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베를린은 그의 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시험합니다. 그는 노점상을 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범죄 조직에 휘말리며, 사랑하는 여인마저 잃게 됩니다. 이 과정을 읽으며 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역시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에 휩쓸리곤 하니까요.

되블린은 프란츠의 실패를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무너지는 과정을 냉정하면서도 연민 어린 시선으로 관찰합니다. 프란츠가 친구 라인홀트에게 배신당하고 다치는 장면은 신체적 상실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취약함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깊은 슬픔과 동시에 묘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다운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도시 속에서 길을 잃은 프란츠의 모습은 단순히 1920년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대도시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매일같이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경쟁과 생존의 압박, 인간관계의 배신,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 프란츠가 겪는 모든 고통은 시대를 초월한 현대인의 보편적 고독입니다.

파편화된 서사 속에 담긴 실존의 진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가장 독특한 점은 그 서술 방식입니다. 파편화된 서사 속에 담긴 실존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알프레트 되블린은 전통적인 선형 서사를 거부하고, 신문 기사, 광고 문구, 성경 구절, 민요 가사 등을 작품 속에 무작위로 삽입합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파편적 구성이 혼란스럽게 느껴졌지만, 읽어나갈수록 이것이 프란츠의 혼돈스러운 내면을 표현하는 완벽한 방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란츠의 의식은 도시의 소음과 뒤섞이고, 그의 기억은 현재와 과거를 오갑니다. 이는 단순히 문학적 실험이 아니라 현대인의 정신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역시 수많은 정보와 자극으로 파편화되어 있지 않습니까. 되블린은 이러한 현대적 의식의 흐름을 80년도 더 전에 포착해낸 것입니다.

특히 프란츠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후반부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곳에서 프란츠는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죽음과도 같은 절대적 고독을 경험합니다. 이 장면들을 읽으며 저는 진정한 변화는 안락함이 아니라 극한의 고통 속에서 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프란츠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되블린의 서사 기법은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명확한 의도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결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으며, 우리의 삶 역시 선형적이지 않습니다. 파편화된 서사를 통해 우리는 프란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의 고통과 혼란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 지닌 문학적 위대함입니다.

절망 너머의 재생, 인간다움의 회복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 단순한 파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절망 너머의 재생, 인간다움의 회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프란츠는 결국 카를 비버코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통속적인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평범한 노동자로 살아가며, 세상은 여전히 가혹합니다. 그럼에도 프란츠는 이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거대한 시스템에 저항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습니다.

알프레트 되블린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고, 세상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프란츠의 여정은 우리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얼마나 완벽함을 강요받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공해야 하고, 강해야 하고,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우리는 프란츠처럼 무너집니다. 하지만 되블린은 무너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고,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시작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프란츠가 팔을 잃고도 다시 일어선 것처럼, 우리도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다움의 회복이란 결국 우리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프란츠는 더 이상 완벽한 삶을 꿈꾸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약하고 실수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 일터로 향합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반복 속에 진정한 용기가 있습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단순히 1920년대 독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프란츠 비버코프라는 인물은 완벽하지 않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으로 인해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때로는 무너져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거대한 도시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느껴질 때, 알프레트 되블린의 이 작품은 우리에게 조용한 위로와 함께 살아갈 용기를 건넵니다.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다.